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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지는 이 가을에 짧은 가을시 모음, 베스트 5와 함께 행복한 시간 되시리라 확신합니다.
가을 달 / 장옥관
납작 마당에 엎디어 불볕을 견딘 채송화
꽃따지 키 낮은 꽃들
떠밀리고 떠밀려 어스름 속 수제비국을
받아들면 거기,
국물 속에 떠오르는 또 하나 감자알
감자는 자주 목이 메이지.
단칸 셋방 옹기종기 모여앉은 식구들
누군가의 발길질에 끓던 국솥이 뒤집어지고, 생각의 어둠이
대문 안으로 밀려들고, 아이들은 소리치며 골목으로 내달아친다
국은 기름때의 세월은 진 냄비처럼 마당에 굴러 떨어져 이윽고 여름이 지나는 것이다
늙은 어머니는 화단의 봉숭아를 뜯어 달아나려는 열 손가락을
칭칭 붙들어매고, 식은 국물 속 죽은 귀뚜라미를 남몰래 건져 내고,
마루까지 몰려온 어둠을 천천히 쓸어 내린다
아이들이 벗은 무르팍
딱딱한 피딱지를 떼어내면 묵은 상처 속
봉숭아 손톱같은 달은 다시 차오르고
가을 엽서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눠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 주고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이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가을처럼 우리 사랑하자 / 박고은
가을은 천 길 이랑마다
울긋불긋 물감 적시어
마음 화폭에 범람하는 빛,
은은히 차오르는 달빛같이
아름다움은 그냥 스미는 것!
시드는 것이 싫어
세월을 내쳐봐도
절로 입혀지는 연륜,
닳고 묵은 느낌
비워야만, 벗어야만이
곱게 물이 드는 추색 풍요
심혼에 뜬 홍엽 한 잎 품고
물 묻은 감탄사 하나
심쿵한 가슴에 찍고,
가을빛처럼 깊은 동공 맞추며
가을처럼 멋있게 우리 사랑하자
가을에 아름다운 사람 / 나희덕
문득 누군가 그리울 때
아니면
혼자서 하염없이 길 위를 걸을 때
아무것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단풍잎 같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어질 때
가을에는 정말
스쳐가는 사람도 기다리고 싶어라
가까이 있어도 아득하기만 한
먼 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미워하던 것들도 그리워지는
가을엔 모든 것이 다 사랑하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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